1052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부친 미치나가로부터 물려받은 별장을 사찰로 개축하여 평등원(뵤도인)을 창건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불법의 가르침이 쇠퇴하고 말세가 시작된다는 말법 사상이 귀족과 승려들의 관심을 끌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정토 신앙이 사회 각층에 널리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1053년에 아미타 불당(봉황당(호오도))이 완공되었고 불당 내에는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 작가 조초가 만든 2.43m 크기의 아미타여래 좌상이 안치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약 1000년 전에 만들어진 건축물과 불상이 지금까지 전해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헤이안 시대(8~12세기)
- 1052년
-
후지와라노 요리미치가 부친 미치나가로부터 물려받은 별장을 사찰로 개축하여 평등원(뵤도인)을 세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상>> 에도 시대 초기(17세기 경): 정토원(조도인) 소장
- 1053년
-
말법 사상과 정토 신앙이 사회에 퍼지면서 아미타여래 좌상을 안치한 아미타 불당(봉황당(호오도))을 세움
아미타여래 좌상에 대해서 >>
봉황당(호오도)에 대해서 >>당시 많은 불당과 탑이 경내에 세워졌으나
대부분이 소실됨<<평등원(뵤도인) 경내 옛 그림>> 에도 시대(1603년~1868년): 최승원(사이쇼인) 소장
- 1180년
-
모치히토 왕의 영지에서 헤이 가문을 타도하기 위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가 군사를 일으켜 우지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고 그 후 평등원(뵤도인)에서 자진했다. 일본 역사 상 최초의 할복으로 이후 무가의 명예로 여겨지게 되었다.
현재 그 장소는 ‘부채 잔디(오기노 시바)’로 불리며 경내에는 요리마사의 묘가 있다.
부채 잔디(오기노 시바)에 대해서 >>
閉じる
중근세: 12~19세기
- ~1230년12세기 경
-
창건 당시의 본당 터에 관음당(간논도)를 세움
- 1336년
-
아시카가 군과 싸우던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평등원(뵤도인) 주변을 방화하여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됨 - 1496년
-
평등원(뵤도인) 복구를 위해 정토원(조도인)을 세움
- 1640년
-
나한당(라칸도)을 세움
- 1654년
-
최승원(사이쇼인)을 세움
- 1670년
-
아미타 불당(봉황당(호오도)) 대규모 보수 공사 실시에서 정면 문 교체.
이 때부터 아미타 불당을 봉황당(호오도)으로 부르게 되고,정토종의 정토원(조도인), 천태종의 최승원(사이쇼인)이 협력하여
평등원(뵤도인)을 관리하게 된다. - 1698년년
-
우지 대화재로 인해 사찰의 황폐화가 가속되고,
이후 봉황당(호오도) 여닫이문 그림이 많은 낙서로 뒤덮이게 된다.
閉じる
근현대19~21세기
-
사찰이 계속 황폐해지는 가운데 봉황당(호오도) 보전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 1902~1907
-
봉황당(호오도) 보수 공사(1868년~1912년),
동시에 운중공양보살상이 현재 모습으로 복원 - 1950~1957
-
봉황당(호오도) 보수 공사(1926년~1989년)
- 1951
-
봉황당(호오도)과 아미타여래 좌상이 국보로 지정
봉황당(호오도)이 10엔 주화 디자인으로 선정되어 발행 시작
범종, 운중공양보살상, 천개(불상 위를 가리는 닫집), 봉황당(호오도) 여닫이문 그림,
봉황이 차례차례 국보로 지정 - 1967~1972
-
문화재 보호를 위해 ‘봉황’ ‘범종’ ‘봉황당(호오도) 여닫이문 그림’ 순으로 교체 실시
- 1990~2003
-
스하마 복원을 포함한 정원 정비
- 1994
-
‘고도 교토 문화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 2001
-
뮤지엄 봉상관(호쇼칸) 개관
- 2003~2007
-
아미타여래 좌상, 천개 보수 공사
- 2012~2014
-
봉황당(호오도) 보수 공사(1989년~)
閉じる